▷천년왕국 교리가 기독교 세계관에 끼치는 영향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주와 함께 천년왕국을 누릴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
이에 관한 해석에 있어서 기독교 안에는 대략 3가지의 견해가 있다.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이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에 임할 것이라는 해석이고,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이후에 주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해석이며, 무천년설은 천년왕국이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라 상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따로 존재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두고 일반적인 역사 속에서 성취될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리고 전천년설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또 구분할 수 있다.

워낙 요한계시록의 성서신학적 해석 자체가 난해하고, 종말론에 대한 각 교파간의 조직신학적 입장이 다양하다보니 천년왕국에 대한 신학적 주장들도 하나로 증명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한 예로 초대 교부들 중 오리겐(Origen)과 어거스틴(Augustine)은 무천년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로마 캐톨릭 교회도 무천년설을 가르쳤고, 종교개혁자 칼빈도 무천년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칼빈의 모든 교리를 따르는 한국 장로교에서 유독 종말론 만큼은 칼빈의 무천년설이 아닌 전천년설을 오랫동안 불변의 정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한국에 처음 기독교를 소개했던 북미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래에 다가올 교리인 종말론의 형성에 대해서는 성서신학적 해석보다는 교단적 전통과 시대적 정황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 장로교의 신학교 안에서는 다양한 종말론이 공존하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아니면 이단 취급을 받았었다. 고신은 전천년설, 통합측, 기장은 후천년설과 무천년설이 공존하고, 감리회, 성공회는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편이다. 순복음교회와 성결교회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고수하고 있다.

종말론 특히 천년왕국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아무리 신학적 논쟁을 해도 한 가지 결론을 증명해낼 수는 없다. 자연과학처럼 실험에 의해서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론 특히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그 교리가 기독교 세계관과 선교관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파악하고, 이 시대에 맞는 교리를 선택해서 필요에 의해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유익할 것으로 본다.

요약컨데, 전천년설은 염세적이고, 후천년설은 낙관적인 관점을 준다. 그래서 전천년설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임박한 종말론에 근거해서 급박한 선교 열정을 불러 일으킨다. 1886년 시작된 무디의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도 그러한 종말사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동양선교에 대한 뜨거움을 주어 선교운동에 동원할 수 있었다. 50년간 2만 500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신앙탄압에 저항하던 한국교회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교의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종말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상은 주의 재림이 오시기 직전까지 극도로 악해진다는 것을 각오할 때 죽음도 불사하였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종말사상에 근거한 세계관에는 약점이 있다. 지나치게 염세적이기 때문에 간접적인 선교나 사회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극단주의에 빠질 수 있다. 이단도 많이 나온다. 후천년설은 이렇게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다는 신앙적 낙관주의이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주의는 비현실적이기 때문에 괴리감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교회가 많아지고 모든 미전도 종족에 복음이 전파될 날이 머지 않았다는 희망 속에서 세상은 여전히 부패하고 신앙이 후퇴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천년설은 그 두가지 양극단에 균형을 준다. 세상에 하나님의 왕국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은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지나친 낙관론도 지나친 비관론도 아닌 겸손의 승리론을 갖고 종말의 날까지 긴장해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삶 속에서의 선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말고, 교회가 아무리 복음에 왕성해져도 교만하지 말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럼 이 시대는 어떤 상황인가? 교회가 물리적으로 풍요로운데 영적으로는 더 핍절하고 있다. 선교의 조직과 규모는 방대해졌는데 진정한 회심은 더 어려운 시대이다. 정치적 신앙박해는 적지만, 문화적 공격은 치열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지나친 낙관론을 내려놓고 겸손히 깨어 기도해야한다. 반면 세상이 악해진다고 너무 일찍 비관하지 말고, 삶에서 간접적인 선교적 영향력을 계속 발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삶과 선교 현장에 어떻게 적절하게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적절한 종말론이 무엇인가를 판단해서, 자기 교단이나 신학적 학파를 초월하여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교회와 선교 현장 지도자에게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