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러분 위급한 상황에서 911에 전화를 하면 경찰이나 응급차가 몇 분 만에 올까요? 물론 지역마다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미국 평균 10분이라고 합니다. LA는 6분입니다.
그러면 오레곤은 얼마나 걸릴까요? 오레곤은 오래걸립니다. 몇 년 전 21분이라고 경찰청이 발표했습니다.
심정지 환자의 골든 타임이 4분 남짓해서 그 시간이 넘어가면 뇌와 신체가 손상되기 때문에 스스로 응급조치를 할 수 있어야만 생존확률이 높아집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응급 요청에 대해서 경찰서의 관할에 제한을 두지 않고 무조건 가장 가까운 경찰이 신속 출동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범죄현장에 3분 이내에 도착하게 되어 범행 현장 검거율이 60% 늘었다고 합니다.
한강 영동대교에서 투신자살하려는 청소년이 있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이전 같으면 5분 걸리는 광진경찰서 관할 대신 청담파출소에서 1분 30초 만에 현장에 도착해서 투신을 막았다고 합니다.
요즘 미국에는 경찰 인력이 부족해서 웬만한 도난 신고는 경찰이 아예 오지도 않고 며칠 후에 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911만 믿고 기다리면 안 되고, 스스로 보안에 신경쓰고 심폐소생술 CPR도 배워두셔야겠습니다.
응급상황에서 응급차나 경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심정이 얼마나 답답할까요?
그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심정이었습니다.
(17절) 우리를 도와줄 사람을, 우리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우리를 구하여 주지도 못할 나라를, 우리는 헛되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빌론의 침공을 받은 유대 왕국 안에는 친바빌론파와 친이집트파가 있었습니다.
신하들 중에 ‘신흥 바빌론과 화친해서 빨리 속국이 되면 비참한 멸망은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반대로 ‘뭐니 뭐니해도 이집트가 강국이니 군사 원조를 요청해서 바빌론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만 안에도 친중 정치인과 친미 정치인이 나누어져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또 우크라이나 안에도 친러시아 세력과 반러시아 세력이 존재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예레미야 당시 유대의 내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군사력은 이제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누구를 지켜주기는 커녕 자신 스스로를 방어하기에도 위태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집트만 믿고 바빌론에 반기를 들었던 유대는 아무리 기다려도 지원군이 오지 않아서 결국 비참하게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의 순간에 생존 본능이 발동해서 뭔가 자기 보다 힘센 존재를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람의 도움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임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1. 그 첫 번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시편 146:3, 개정)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사람에게는 도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돕고 싶어도 도와줄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 자녀들의 인생을 위해서 부모는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 parenting의 101은 ‘우리에게는 자녀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여러분 자녀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성장하도록 만드실 수 있으세요?
-여러분 자녀들이 정신적으로 갈등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란을 겪을 때 그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 자녀들이 노력하는데도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데, IQ를 좀 높여주실 수 있으세요? 학비는 대주어도 학업능력을 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이성문제로 힘들어할 때, 성격 좋고 능력있는 배우자를 어디서 데려다가 맺어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 자녀가 육신의 질병 문제로 고통당할 때, 전문의가 치료해줄 수 없는 문제도 여러분이 해결해줄 수 있습니까?
병원비는 대줄 수 있을지 몰라도 건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가 해줄 수 있는게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식의 인생을 여전히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 착각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도와주라고 하지 않고, ‘네 자녀를 위해 울라!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두 번째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60:11, 우리말성경) 이 고통 속에서 우리를 도우소서. 사람의 도움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함에서 비롯됩니다.
현대인들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지나칠 정도로 따라합니다.
한때 산에 가서 나무 등치기 하면 좋다는 방송이 나오니까 뒷산 약수터에서 어르신들이 죄 없는 나무에 등치기 하시다가 골다공증 있는 할머니가 허리 부상. 누가 K약수터 영상을 찍었는데 외국에서는 무슨 좀비 출현으로 오해하겠더라구요.
그런데 전문가들이 발간하는 책 제목들을 보니까, ‘잘못된 건강 정보가 오히려 몸을 망친다’ 라든가, ‘잘못된 운동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youtuber들의 목적은 조회수와 수입입니다. 그래서 자극적인 콘텐츠들 중에는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도움을 준다는 뜻으로 하는 행동이나 말이 실제로 상대방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보상회로인 측좌핵이 급속도로 발달하는 반면, 위험을 알리는 편도체는 늦게 발달합니다.
그래서 청소년기에는 처벌, 잔소리 등의 부정적 피드백은 효과가 없고, 오히려 칭찬과 보상을 통해 도파민이 증가하도록 할 때 행동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엄마들 잔소리로 도와주려고 하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되고 역효과만 난다는 것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게임 좀 그만하라고 막 소리를 지르는 대신에, 게임 시간을 줄이고 운동하고 방 정리하면 칭찬해주고 맛있는 음식이나 선물을 주는 방법을 사용해보시기 바랍니다.
3.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딤후 3:2, 4)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배신하며…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끝까지 도우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일의 비만 전문의사인 ‘아힘 페터스’는 [이기적인 뇌 이론](selfish brain theory)을 발표해서 학계의 컨센서스를 일으켰습니다.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식량부족으로 굶어죽은 사람들을 부검해보았더니, 모든 장기는 40%나 줄어들었는데, 뇌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뇌는 매우 이기적이어서 자기가 필요한 에너지를 먼저 사용하고 남는 것을 신체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뇌의 무게는 1.3kg에 불과 하지만 섭취에너지의 20%를 독차지합니다. 근육은 인슐린이 있어야만 포도당을 사용하지만, 뇌는 포도당 없이도 엄청난 양의 포도당을 소모합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뇌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비만이 되든 중독으로 망가지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위한 에너지를 공급받기 위해 계속 폭식하도록 명령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진 인간의 이런 이기심은 대인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내가 여유가 있을 때에는 남을 돕지만, 내가 곤고할 때에는 생존본능 모드로 전환해버리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무능하고, 무정하고, 무지합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사람의 죄성과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도움을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그래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니까 남을 도울 것도 없고, 도움 받을 것도 없어. 각자 알아서 사는거야!’
이게 결론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결코 개인 이기주의를 권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서로 사랑하면서 삶을 나누는 공동체적 영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서구 사회의 개인주의 영향을 받아서 ‘민폐 끼치지 말고 각자도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문화가 팽배합니다.
물론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남을 배려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구 개인주의의 깔끔한 삶의 방식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오래 사신 분이 문화의 차이를 벤 다이어그램으로 비교했는데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서구 사회 (한국 사회)는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대신에 서로의 사생활을 보장하고 침범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전통 사회는 서로의 삶의 바운더리가 구분되지 않고 많이 겹치지만, 개인의 자유의 폭은 더 넓습니다.
아직도 옛날 생활방식과 문화가 남아있는 동남아시아는 무질서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의 자유로운 행동을 더 많이 용납해준다고 합니다.
민폐라는 생각을 안 하고, ‘너도 편하게 살고 나도 편하게 살자’ 라는 낙천적인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한국 교회는 가정 심방을 많이 안 한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살던 1990년대만 해도 교회는 춘계, 추계 대심방을 꼭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웬만하면 밖에서 만나고 집에 잘 초대를 안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정교회 목장은 그런 개인 이기주의 문화를 따라가지 않고, 성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합니다.
단 목장이 사랑의 공동체이고 삶을 나누는 장소이긴 하지만, 무한정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도와주면 좋고 안 도와줘도 괜찮아~!’
사람을 기대와 의지의 대상으로 삼지 마시고, 할 수 있는 만큼 사랑하고 섬김의 대상으로만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그럼 성경에서는 우리가 어디에서 도움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아까 시편 146편을 보았었는데요, 이어지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시편 146:5-7)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또 다른 구절도 보시겠습니다.
(시 121:1-2)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
(시 115:9) 이스라엘아, 주님을 의지하여라. 주님은, 도움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신다.
사람은 무능하고, 무지하고, 무정해서 무한정 도움을 기대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사랑이 무한하셔서 우리가 도움을 기대해도 실망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